여울목

[사색]인간 그리고 한국사회, 세계

황새울 2006. 7. 4. 17:56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글이 자신의 성찰 즉 자신의 반성-김영승詩人은 '반성'이라는 연작시를 써낸 적 있었다-을 통해 자신의 오류점과 시각교정 그리고 태어나고 자란 환경오류를 재수정해내는 과정을 거치고 그 범위를 인간이라는 특정 동물로 확장시켜 나가며 객관화-글은 과연 객관적일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항상 고민해왔다. 과연 詩도 객관적으로 써낼 수 있을 것인가? 나의 결론은 객관화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객관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라는 점은 인지되어야할 것이다.-와 주관화를 거쳐 사회 즉 인간 군상의 결집체인 세계로 확장되어지고 그 후 전체적인 자연 즉 인간을 자연에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박경리씨의 생명에 대한 사고와 비슷할 지 모르겠다. 김지하 詩人이 생명사상을 얘기하는데 내가 볼때 장모인 박경리씨의 영향인거 같다. -로 나아가게 되며 그리고 우주라는 거대 생명체로 확장되어지는 것이다. 물론 순서가 규칙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순서는 인간이 만든 규범이니.
그러한 반성들을 가지면서 세상을 바라보면 모순점이 눈에 보인다. 그 모순은 나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이고 타인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이며 좁게는 한국사회 그리고 넓게는 전세계-나는 한국이라는 섬나라(한국은 섬이다. 엄밀히 말하면 south korea는 섬이다.)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다. 하지만 세계라는 것도 개인에게서 시작하며 또한 그 개인이 이룬 가족에서 출발하지 않든가. 한국에서 벗어나보지는 못했지만 작게나마 읽은 책들에서는 한국을 벗어났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에서 나타나는 모순이다. 다시 말해 인간사회-인간만 한정적으로 범위 짓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 자연을 지속적으로 자극하니 인간에 의한 자연도 포함되어져야할 것이다.- 속에서 나타나는 모순인 것이다. 그 모순은 하나의 구성체, 작게는 가족이라는 구성체에서도 나타나며 더 작게는 친구라는 임의적 구성체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그 모순을 인간은 포괄적으로 보지 못한다. 즉 다수의 인간 시각은 한정적이다. 그 시각이 한정적인 것은 두뇌범위 다시말해 사고력의 범위가 한정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자신이 경험한 것만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신만의 경험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조차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시각 속에서 포괄이라는 의미는 낯선 단어일 수 밖에 없다. 아니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단어일 것이다. "첫째로는 일상생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정신적인 힘, 즉 일상적 사고의 지평을 질적으로 넘어서서 사고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루카치 미학 1권 p79] 인용된 루카치의 말처럼 사고의 지평을 질적으로 넘어서기에는 흔히 얘기하는 대중 혹은 보통사람-정확히 얘기한다면 구속되어있는 노예라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른다.-은 턱없이 힘들다. 물론 아주 특별한 정말이지 인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경험이 있지 않고서는 그 지평을 넘어설 수가 없다. 그 특별한 경험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도 않으며 주어진다고 해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어느 책의 글귀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막스는 역사의 수수께끼를 명확히 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수수께끼의 원인을 밝히지는 못했다고. 과연 그럴까?
역사의 수수께끼가 바로 모순이다. 어쩌면 욕망 혹은 탐욕이라는 기독교적인 단어로 대치될 수도 있을 지 모른다.<한글이 얼마나 한정적이고 사고제한을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언어를 보면 그 언어 사용자들의 사고를 가늠할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유통되고 있는 south korea의 언어는 심각한 수준이다. 새로 재창조되는 언어 없이 바로 원어를 직수입하고 직유통하는 이러한 현상은 심각한 절단을 유발할 것이다. 사고 고리에 대한 절단을. 글을 어느 정도 다루어 본 사람이라면 한글이 얼마나 사회적 합의가 없는 언어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흔히 한글이 형용사가 뛰어나다면서 푸르다, 파르스름하다, 퍼렇다 등을 일례로 얘기하는데 그건 영어에서도 똑같이 아니 더 확장되어있다. 한글보다 더 많은 색분류를 만들어 유통하고 있다. 웹디자인이나 색상표를 아는 이들은 더 잘 알리라. 영어권의 나라를 명사형 언어의 나라라고 하는데 그 명사형이야 말로 사회적 합의 개념이 정착된 단어형태일 것이다. 일례로 한글(정확히 얘기하자면 한자어, 그것도 일본식 한자인지 중국식 한자인지 모를) "관용"이라는 단어를 보자. 관용과 대치될 수 있는 단어가 무엇이 있는가? 관대,情(정), 정으로도 대치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 또 다른 단어는 무엇이 있는가? 그런데 그 뜻은 무엇으로 합의되어있는가? 막연한 관용이고 막연한 情이 아니든가? 내가 우연찮게 영어사전을 보다 찾아낸 단어들을 얘기해보겠다.

* tolerance:자기로서는 찬성하기 어려우나 남의 권리로서 인정하기, 남의 사상.의견 따위에 대해서 쓰이는 일이 많음.
* toleration:남의 행동에 대해서 쓰이는 일이 많음.
* generosity:남에게 자진해서 주려는 넓은 마음.
* magnanimity:인간의 크기를 보인는 도량, 도량이 넓음. 주로 고위층의 사람에게 쓰임.
* liberality:generosity와 비슷하며 '아까와하지 않는 관대함'을 나타내는 동시에 '사물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에서 오는 관대함'도 나타냄.

하나더 아주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대략 천년전 쯤 south korea에서는 진보와 보수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돌섬에 파도가 몰아친다고 갈매기도 떠난다고 소리치더니 그 진보와 보수가 사라져버렸다. 그때 쓰였던  '진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적어보겠다.

* liberal:인습에 묶이지 않는 새로운 것에 대해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진보적.
* progerssive:항상 전진.개선을 지향하여 침체. 복고를 나쁘게 생각하는 점에서 진보적.  
* advanced:여느 누구 '무엇'보다 앞선.
* radical:급진적인, 과격한. 현존하는 여러 제도. 관습을 인정치않고 revolutionary(혁명적)에 꽤 가까움.
-꽤 오래된 에센스 영한사전이라 좀더 명확히 할 필요성은 있다.
이러한 명사형 단어들은 오랜 사회적 합의 없이는 이렇게 세세히 구분되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그렇다고 내가 외래문명우월주의자는 아니다.-
그리고 하나 더 현재의 한글이 과연 어느 시대때 만들어진 한글인지 명확히 해야할 것이다. 세종때 만들어진건지 일제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건지.-이 부분은 백년이나 흘러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쓰는 상당수의 글자들도 일제식 글자일 것이다. 그건 내가 그렇게 교육받아왔고 번역된 책들과 이 나라 책 자체도 일제식 글자로 가득 메워져있기때문이다. 그리고 무의식 속에서 그걸 받아들이고 있다. 이건 단순한 학교 교육의 국어부터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사회 구조의 뿌리 자체가 썩어있는 문제인 것이다. >
<기독교, 어느 현대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었다고 한다. 현대철학의 시발점은 "내가 너를 돕겠다"에서부터 출발한다고. 과연 그들은 나를 도왔는가?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누구나 제기하는 의아성이 하나 존재한다. 왜! 기독교를 비판한 얘기가 없는가? 그리스.로마 시대 그것도 아우구스티스 이전에 모든 이들은 기독교를 찬양하였는가? 그 집단 즉 기독교를 통한 이득을 얻는 무리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깨끗하게 청소를 해댔는지 비판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황순원씨의 "손님"에서 조차 기독교를 제대로 비판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도 단지 소설일뿐인데도 말이다.-철학 아니 사고의 진화를 해나가면 나갈수록 이 기독교의 녹슨 철옹성과 부딪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있다. 이 나라 즉 south korea는 교황청에서도 주시하는 기독교 國家라는 것을. 단 100년만에 2000만 인구가 기독교인이다.-외국의 시각에서. 나는 글쎄, 정말인가라고 생각지만->
십수년 전의 영화감독들은 특히나 미래영화 흔히들 sf라고 하는데-그 대표작으로 '블레이드 러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류의 영화에서 미래는 아주 어둡고 칙칙하게 표현된다. 그들은 아마도 이 역사의 수수께끼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언젠가는 기독교의 녹슨 철옹성과 부딪히고 그 녹슨 철옹성을 넘어섰을 때 더 큰 철옹성인 역사의 수수께끼에 부딪히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나는 얼마만큼 이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언제까지 부딪힐 수 있을 것인가? 유한의 시간 속에서.

요즘들어 자주 이런 생각을 가져본다. 내가 재밌게보는 "이누야샤"-이름이 뜻하는 바가 뭔지 찾아봐야하는데 귀차나니즘에 빠져서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라는 만화에 나오는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나락'이라는 주인공이 있다. 그 나락의 모습을 보면 수많은 요괴를 자기 몸으로 흡수한다. 그리고 그 요괴의 장점만을 부각해서 분신을 만들어낸다. 물론 절대 장점만으로 만들어내고 싶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가 보더라. 가끔 실패하는 경우도 있으니.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은 이 나락과 같지 않은가 싶다. 흡수하고 융합하고 다시 분출하는. 물론 그 뿌리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리고 "제5원소"의 여주인공의 모습이 떠오른다. 모니터에 war라는 단어를 치니 수많은 참혹함이 나타난다. 그 모습을 본 여주인공은 그 정보, 그 느낌, 그 참혹함을 공유한다. 그리고 눈물로서 얘기를 한다. 어쩌면 그 여주인공의 공유와도 같은 지도 모른다.

끝으로 막스의 글로 맺을까 한다.-참고로 난 공산주의자도 아니며 막스의 추종자도 아니다. 더군다나 막스의 책을 읽어본 적도 없다. 이 인용문도 다른 책을 읽다 알게 된 것이다.막스와 같은 철학자는 이제 더 이상 이 지구상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인간일 뿐.

"공산주의는 사유재산과 인간의 자기 소외의 적극적인 지양이며, 따라서 인간을 통한, 인간을 위한, 진정한 인간 본질의 확보이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 즉 진정한 인간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에로의 복귀, 지금껏 이루어진 풍부한 발전의 모든 것을 종합해내는 완전하고도 의식적인 복귀.
충분히 발전한 자연주의로서의 공산주의는 인간주의이며,
충분히 발전한 인간주의로서의 공산주의는 자연주의이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적대 관계의 '명확한' 해결이다.
... 사유 재산의 지양은 인간의 모든 감각과 속성의 완전한 <해방>이다. 그것은 이러한 속성과 감각들이 객관적으로뿐만 아니라 주관적으로도 <인간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완전한 해방이다.
Karl Marx [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s of 1844]



 

 

 

2005/04/08 13:1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