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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울 2006. 7. 3. 13:13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글쟁이와 나에게"

(pop-up)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짓거리로 생계를 유지하든 하지않든
또한 그 짓거리로 떼돈을 벌든 그렇지 않든
그 짓거리 자체만으로도 다른 사람보다 하나만큼의 더 많은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누가 그 무게를 강요적으로 지우지도 않았으며
또한 스스로도 그 무게를 지고자한 이도 없을 것이다.
글,
그 자체를 다룰 줄 알고 조합하여 새로운 향기를 창출해내는 모든 글쟁이들은
이 무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무게라 함은 양심, 창작에 대한 욕망, 글쓰기에 관한 우울증... ...
이런 것일 수도 있겠으나
가장 큰 무게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
글을 쓰기 위해 모든 정보를 모으고 분류하고 편집하거나 창조하여
글이 나왔을 때 그 글에 대한 에너지가 변환한 파장까지 고심해야하는 무게일 것이다.

각설하고(closed)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글쟁이와 나에게
언젠가부터 예견되어왔듯이 時代는 고도의 자본흐름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모든 순수한 가치들은 자본으로 환산되어지지 않으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순수한 가치들마저 자본의 옷을 입기 위해 지랄발광하는 時代인 것이다.
돈이 되냐? 안되냐?
이게 새로운 가치의 척도이며 성공의 나침반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는 글 마저도 이 척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글은 소수자에게는 거대한 돈이 되어 주어지기도 하고
다수자에게는 돈은 커녕 끝없는 어깨의 무게로 짓누르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 무게를 잘 감당해내고 있는가?
나는 나에게 스스로 이 질문을 했을 때 '글쎄'라고 대답할 수 있을 뿐.
기실 이 무게는 감당해내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내팽개쳐버릴 것인가?

글은 時代의 흐름에 조우하여
권력에 빌붙어서 권력의 시종이 되기도 하였으며
종교에 빌붙어서 종교의 선교사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중에 빌붙어서 대중의 심심풀이 땅콩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나의 글이 우리의 글이 시종이, 선교사가, 땅콩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고 내팽개쳐버릴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글과 동화되어
글과 나, 나와 글을 분리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글을 내팽개쳐버린다는 것은 나를 내팽개쳐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이다.
나의 글이 시종이, 선교사가, 땅콩이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하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 즉 살아가면서 삶에 대해 필요한 에너지는
부딪힐 수 있나없나만큼의 에너지다. 부딪힘에 대한 에너지 즉
충돌할 수 있는 에너지가 점점이 소진될수록 그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떠한 선택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충돌하여야하고 끊임없이 창조해내야만 하는 본능이 있다.

돈이 되냐! 안되냐!
그것이 예수의 말이냐! 아니냐!
그것이 예(禮)냐! 아니냐!
그것이 군주의 말이냐! 아니냐!
그것이 대중의 기호에 부합되냐! 안되냐!

이 모든 가치의 척도는 끊임없이 바뀐다. 물론 온전하게 속까지 바뀌지는 않지만.
또한 순식간에 바뀌지도 않는다. 다만 순식간인냥 느껴질 뿐.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본능이다.
충돌할려고 하고 끊임없이 창조해낼려고 하는 본능

그 본능의 싹은

나는 무엇인가

일 것이다.

그 본능의 싹을 미처 거세하지 못한 우리는
이 싹은 끊임없이 유전되어질 것이고
또한 끊임없이 충돌되어질 것이며
끊임없이 창조되어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에 이르러 이 싹이 꽃을 피우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언젠가 이 싹은 꽃을 피우게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황량한 벌판에 한송이 꽃일 지라도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글쟁이와 나에게
내가 쓴 모든 글은 습작이다.
단 한편의 詩가 되기 위한
그 한편의 詩가 되지 않았다면
그 한편의 詩가 내가 죽을 때까지 되지 않았다면
나의 모든 詩는 습작이다.
그러나 슬퍼하지마라.
우리의 모든 습작은 훌륭한 거름이 되어질테니.

그대!

끊임없이 충돌하고 끊임없이 창조하라.





詩代호 선장 황새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