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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이창기시집[문학과지성사]

황새울 2006. 7. 3. 14:59


나는 시집을 선택하기 전에 버릇이 있다. 아니 해묵은 습관이 하나 있다.
시집의 제목과 일치하는 시를 읽어보고 마음이 동하면 선택하는 습관이다.
물론 시집이 다 똑같지 않아 제목과 일치하는 시가 없을 때는 시 서너편 보고 마음이 동하면 선택한다. 이렇게 선택하는 습관을 가지기까지는 많은 유혹들을 뿌리쳐야만 했다.
화려한 색상의 옷차림새인 겉표지의 유혹을 뿌리쳐야만 했고 모 아니면 도라고 양대 출판사의 유혹을 뿌리쳐야만 했고 시인의 화려한 발자취에 대한 유혹을 뿌리쳐야만 했었다. 그렇다고 지금은 이 유혹의 손길을 완전히 벗어난 성인군자가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도 유혹에 덥썩 먹힌다. 때때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정말이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바깥 세상 어디에도 내안 세상 어디에도. 나를 어디다가 내팽개쳐버렸는지 기억이 안난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들이 술에 찌들었나보다. 이렇게 기억이 안나니. 폭탄주 같은 삶이었나?
여태 나라고 부르고 싶은 모양새하나 못 갖췄다니 서글프기도 하다. 그렇다면 시인은 행여 모양새를 갖췄을까? 라는 호기심에 시집을 빼어든다.
시의 제목이 극적인 반전일지도 모른다는 치밀한? 계산하에.

넌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거니!-"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中

치밀한? 계산은 허공에 날려먹고 시인도 찾아다니고 있구나라고 애써 품은 기대의 흐트러짐을 무마한다. 하긴 성인은 아니니!
때론 시인과 성인을 동일시 하는 꿈을 자주 꾼다. 아니, 시인이면 성인과 같이 자기 반성의 길을 갈고 닦는다는 꿈을 자주 꾼다.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말이지. 그런데 그 길이 참으로 가혹한 길이라는 걸 꿈을 해석하면서 뼈저리게 느낀다. 시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하는 사람들이다. 눈에 보이게 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성인과 비슷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간의 입장에서 타인과 달리 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가혹하다. 그게 자력이든 타력이든 간에. 그리고 그것을 꿈틀거리는 본능에 의해 표현하지 못하면 미쳐가는...어쨌든 시인도 인간이다.
어쩌면 내가 꾸는 꿈들 즉 시인=성인 이라는 등식은 나의 부재 속에 자리한 또다른 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재중인 나를 찾아볼 요량으로 이창기 시인의 시집을 빼어들었다가 시인≠성인이라는 부등식의 냄새를 맡고 그를 읽어본다.

우리는 오랫동안 시가 엄숙해야하고 정의와 거대한 선과 악의 전장에서 선의 용감한 전사이며 자유와 꿈과 희망의 여섯자리 로또 복권이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아니 계획된 가르침을 배워왔다.
하지만 시는 꼭! 굳이!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게 거대하게 그렇게 장엄하게 그렇게 심오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하나! 진실하면 되는 것이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中에서

"토끼뎐"을 보며 내내 웃었다.
나를 웃기게 만든 구절은

"3년을복무한갈색토끼가더이상우리에살기를거부하여/교살한뒤반은먹고반은버리다"
"땅굴을파고탈출해.../"
"세번째탈출을감행하다붙잡힌흰토끼를식구들모르게/살해한뒤둑에버리다"

이 구절들 중 특히 선택된 단어 복무,거부,교살,탈출,살해가 나를 더 웃기게 만들었다. 자뭇 웃긴 단어가 아닌 단어임에도 시인의 넋살 비슷함이 느껴져서이다. 그런데 가만가만 살펴보면 연의 마지막에 날씨가 나온다. 그런데 유독 토끼가 죽게된 날만 날씨가 나온다.
맑음->쾌청->화창함->무더움->흐림 으로 이어지는 선율은 시인의 깊은 마음이 날씨로 변환해 보여주지 않는가.
그 절묘한 이중주가 절묘하게 와닿는다.

또한편의 시가 나를 웃음짓게 만들었는데

"心境2
처음 가본 길인데 낯설지 않은" 은 한편의 잔잔한 영화마냥 스르르 지나간다.
마치 처음 본 영화인데 낯설지 않은 처럼

"동네 개들과 죽어라
눈 덮인 솔밭 사이를 뒤쫓아 내달리다"

뛰어본 적이 언제였든가? 순박한 누렁이 도끄랑 이곳저곳 노닐 던 그때가 기억나 나를 웃음짓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시인의 말처럼

"오랜만에 다시 따듯해진 돌멩이
그 뭉툭해진 마음
너, 알지"

"心境6
우리는"

이 노래는 마치 시인을 향해 부르는 노래인 듯 하여 마음에 와닿았다. 전문을 인용해보겠다.

마을 지붕 위로 줄줄이 날아가는
헬리콥터 편대를 따라
서둘러 대오를 맞춰
앞서거니 뒤서거니 날아가던
한 떼의 산비둘기
그 무리 물끄러미 바라보던
호연 마을 초입
가로등과 마주 서 있는 소나무
어느 날인가 작심한 듯
솔방울 하나 둘 떨어뜨리더니
언제부턴가는
잎 버리고 껍질 벗고
너저분한 가지며 이파리 모두 버리고
외발에 맨몸뚱이로
가로등과 똑같은 자세로 고개 숙인 채
밤마다 머리에 불 밝히려고
끙끙대는 그 마음
너, 알지?

밤마다 머리에 불 밝히려고 끙끙대는 그 소나무
정말이지 시인의 모습과 비슷하다.
한편의 시를 낳기위해 밤마다 끙끙거리는

"우리가 더 들락거릴 곳은 없을까?" 라는 시는
마치 영화 "부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같아서 한참이나 세상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시였다.
정녕 우리가 사는 이곳은 우리가 더 들락거릴 곳이 없는걸까? 부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마냥 자신을 버려야만 보이는 곳이 그 마지막 비상구인가?
가만 가만 살아온 길들을 돌아보면 내가 정녕 원해서 들락거린 곳은 몇 곳이나 될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원하고 원해서 열심히 혹은 단한번 강렬하게 들락거린 곳은 어디일까? 정말이지 내마음 깊은 곳에서 원하고 지금도 원하고 있는 그 들락거릴 곳은...

"참 그날 이후로
-장석남에게"

누구에겐가 나도 이런 글을 보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같은 시.
줄줄이 늘어놓지도 않고 일일이 설명하지도 않는 간략하고 함축된 짧고 할말 다 하는 이런 시. 친하지 않은 이가 봤을 때 잘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는 하지만 아는 사람이 보면 굳이 되물어보지 않고도 다 이해할 수 있는 시.
언젠가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묘지"

죽 고 난 뒤 에 도
저 토 록 무 더 기
로 줄 지 어 모 여
국 가 의 관 리 를
받 는 사 람 들 이
살 고 있 다 니 !

어쩌면 우리가 지금 살아서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새마냥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국가의 관리하에 질서 정연히 움직이는 인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살아서도 자유롭지 못하고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하여 관리를 받는다는 생각을 해보면 왠지 서먹할 것 같다. 죽어서는 바람따라 물따라 그렇게 두루두루 흘러다녔으면 좋을 것 같은데...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시집을 읽으며 느낀대로 글가는대로 두루두루 적어보았는데 어수선하지 않을런지 모르겠다. 글이라는게 완벽히 객관성을 지니기가 힘들다. 글 자체가 인간에 의해 쓰여지고 또한 글쓴이의 주관이 완벽하게 통제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이 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편의 시에 모두가 똑같은 얘기를 한다면 그것 또한 무척이나 서먹할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다양성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좋은 시들을 느끼게 해준 이창기 시인에게 고마움을 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