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share)는 시대가 자본으로 넘어서기 시작할때 언뜻볼 때 이해하기 힘든 곳에서 시작되었지 아니 떠오르기 시작했지. 표면화되었다고나 할까? 리눅스를 만든 토발즈에서 시작한 GNU(GNU's Not Unix)시스템이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ree Software Foundation)으로 이식되면서 표면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 너도 알다시피 물론 공유가 그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고 단지 표면화되었다는 것일뿐. 내가 어느 책에서(책 제목이 잘 기억이 안나지만) 본 내용에서 공유가 왜 중요한가를 이야기하면서 뉴튼의 포물선 법칙을 예로 들더군. 만약 뉴톤이 이 법칙을 특허를 내어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과연 과학과 실생활이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겠냐고 말이지. 나도 그 말에 상당히 공감과 동의를 보냈었지. 그런데 요즘 아니 오래전부터 생각들을 해왔지만 과연 공유가 문학에도 접목이 되는가? 였어 사실 교과서적인 얘기들은 많지. 문학이라는 게 그 당시의 현실과 사람들의 느낌,바람 그리고 자연에서 모든 정보를 공유하여 작품으로 나오는 것이므로 당연히 공유되어야한다 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문제는 이게 너무 교과서적이다 이거지. 어쩌면 내 생각이 지극히 협소한 생각일 수도 있는데 원작이 인정받지 못한 공유는 과연 공유일까라는 생각 말이지. 즉 다시 말해 원작은 죽고 공유에 의한 모방작은 산다면 ... 그런데 그게 검은 손에 의한 작품으로 탄생한다면 말이지 이건 뭘까라는. 좀 전에 얘기한 뉴톤의 공유라는 점도 있지만 그건 사실 후세에 얘기하는 것들이고 뉴톤이 진정 이 법칙으로 돈을 벌려고 했을까 안했을까는 미지수지. 작금의 시기에 이에 반하는 일례를 하나 얘기해줄게. 지금 DNA검사는(명칭이 정확한 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미국의 모 바이오회사에 가서 검사를 해야한다더군. 왜냐하면 그들이 그 검사 방법을 특허로 독점권을 쥐고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이 검사를 하는데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시기가 걸린다고 하더군. 샘플을 미국으로 보내야하고 또한 거기서 검사까지 기다려야하고 다시 결과를 보내야하므로. 그런데 카나다 몇 개 주의 병원에서는 이 독점권을 거부하고 단독 검사를 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미국의 그 바이오회사가 소송을 걸려고 한다고 하든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도의적(이게 참 안좋은거 같아. 도의적이라는 거. 권력이 어떻게 사람의 의식을 피지배적으로 만드는지 볼 수 있는 단면인 거 같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거든)으로나 인간적으로 볼때 그런 좋은 검사를 독점한다는 게 이해가 안되지 않냐. 물론 돈벌이에 눈이 멀면 단두대로 겁나지 않는다고 막스가 얘기했지만. 이런 걸 보면 공유가 과연 어떤 의미에서의 공유를 얘기하는지 의심스럽거든. 특히나 교과서적 공유들. 또하나 일례가 있는데 1960년대인가 그럴거야. 미국에서 과학계에 일대 혁명이라고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고 하더군. 순수한 과학자(정말이지 순수한 과학자는 있을까...ㅋ...황우석...글쎄)들이 대거 이 혁명에 가담했었지. 이 혁명이 뭐냐고 하면 일종의 전기 증폭기 였지. 1볼트를 약 천볼트로 증폭시키는 일종의 증폭기를 한 과학자가 개발해낸거야. 미국에서 연일 티브이로 보도하고 난리났었다고 하더군.(물론 나도 티브이로 보고 알았지만...무슨 프로였는지 모르겠네...머리가 자꾸 나빠지네. 메모를 생활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니) 정말이지 1볼트를 천볼트로 증폭시키면 지금 지구상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지. 기아,에너지,자연파괴 등등 하지만 이 혁명은 실패했지. 미국 특허청에서 특허를 내어주지 않았다고 하더군. 아니 그냥 계류중이래. 한국에서 잘 써먹는 방법있잖아. 아직 심사중입니다 라는...ㅋ. 그 시간이 흐를수록 과학자들도 다 떨어져나가고 그걸 개발한 사람 혼자만 그걸 지켜가고 있더군. 그 사람 나와서 인터뷰하는 걸 봤는데 감동적이더군. 나이가 육십인가 칠십줄인데 운동을 하는거야. 왜 운동을 이렇게 열심히 하냐고 하니 내가 건강해야만 내가 발견한 걸 알릴수 있다 뭐 이런 얘기를 하더군. 그 사람 참 대단한 사람이더군. 최근에 네팔에 정부지원을 받아서 시험적으로 네팔에 그 증폭기를 설치한다고 하든데 어떻게 되었는 지는 모르겠더군. 왜 미국특허를 받으려고 하는가 그리고 기업에 팔면 되지 않나라는 얘기는 길어서 못하겠네. 사이트도 있든데 그때 메모를 안해서 모르겠다...쩝 이 얘기가 긴가민가 하는 사람이 많더군. 박교수한테 얘기해줬더니 설마 그런 일이 라는 반응이더군. 내가 X파일의 멀더가 된 기분이더군.ㅋㅋㅋ 기술적으로 봤을 때 가능성이 있다라고 봐. 공학도의 입장에서. 최근에 한국 유학생이 성능을 50배로 향상시킨 전지를 개발했다고 나오잖아. 물론 그 전지의 실용성은 몇년 뒤더라...여기서 함정이 있는거 같다 말이야. 몇년 뒤까지 갈 필요가 없는거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한가지 더 전기가 서서히 실용화되려고 한 18세기 후반인가 19세기 초반인가 모르겠네. 어느 과학자가 전기를 공중으로 보내는 방법을 생각했었데. 사실 전기적으로 봤을 때 전선을 통해서 전기를 보내는 건 엄청난 손실을 감안해서 보내는 거거든. 그래서 그 과학자가 알아주는 유명한 부자(그 유명한 부자든데...세계적으로 그리고 지금도...부는 세습되니)를 투자자로 유치해서 개발에 박차를 가했지. 개발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 부자가 손을 뗐대. 왜? 공중으로 전기를 보내면 누구에게서 어떻게 요금을 받아낼 거냐 라가 문제였다고 하더군. 이런 몇가지 일례를 본다면 정말이지 공유는 안해야될거 같다는 생각이 확들지 않냐.ㅋㅋㅋ 물론 이건 과학이나 기술분야고 그건 문학에 해당사항이 안된다라고 얘기한다면 할 말이 없지 라고 말할거 같지만 내가 누구냐...ㅋ 예술에 관한 일례를 하나 얘기해주지. 피카소는 일반인들에게는 위대한 화가지. 사실 일반인을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그의 같은 동료들 즉 화가들한테는 아주 골치아픈 존재였다고 하더군. 피카소가 다른 화가의 작업장에 나타나면 그들은 그림을 덮는데 급급했다고 하더군. 왜? 피카소가 다른 화가의 미완성작을 한번 봤다하면 그가 표현할려고 하는 것보다 더 낫게 그림을 그려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 정말이지 내가 그 다른 화가였다면 그림질을 접었을 지도 모르지. 피카소때문에...ㅋ 일례를 너무 많이 들었네. 이런 일례들이 머리속에 너무 많이 들어있는거 같군. 이러다 오래 못살지...ㅋㅋㅋ. 이런 상태를 심리적으로 확신오류라고 하더군. 자신이 믿는 것만 믿는다는...ㅋㅋㅋ 그런데 확신오류를 아는 나한테는 해당사항이 안되겠지. 어쩌면 확신오류로 가는 중기단계일 수도 있고...ㅋㅋㅋ 정보를 너무 오래동안 갖고 있는걸 보면...ㅋㅋㅋ 사실 확신오류라는 것도 가만보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행복하게 살기로 한 사람은 행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리고 세상은 행복으로 넘쳐난다고 하니 말이지. 정신의 첫걸음마는 허위와 진실을 구분하는 데 있다라는 까뮈의 말이 생각나는군. 문학에서의 공유는 무엇일까? 유명세를 타는 작가들은 자신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지 않지. 그들은 공유를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흔히 최종의 완성작을 내기 위해서라는 말도 하지만 난 그보다 독점권을 형성할 때까지 기다린다라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물론 유명하지 않을 때는 지적자산권을 올리기 위함과 대중성을 얻기 위해 글을 흘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데 글에서의 교과서적인 의무는 만인의, 만인에, 만인을 위한 이잖아. 그렇다면 당연히 유명할 때나 유명하지 않을 때나 글은 늘상 만인의 곁에 있어야하는게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너도 느끼겠지만 밥줄로서의 글이 되면 문제가 판이하게 달라지거든. 그렇지 않냐? 문학에서 공유에 대한 지침서는 어느 누구도 얘기하지 않을까? 왜 그렇지. 공유되면 누가 손해보는건가? 바벨탑의 저주를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을 해봤지. 과연 신의 저주처럼 인간이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인간에게 수많은 언어를 내려주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의 언어(유형이든 무형이든)로 의사소통을 한다면 누가 손해일까? 라는 정말 누가 손해일까? 모든 인간이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를 가진다면. 이거 재밌지 않냐? 어쩌면 정말 골때리는 문제겠지만. 누구에겐가는 내가 저번에 얘기했잖아. 플라톤의 국가론에 보면 시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시가 정말 개인에게 유익하다면 누군가 운율과 음을 모르는 자가 우리(나는 국가라고 생각한다. 우리를)에게 그 시의 변론을 하라. 만약 시가 개인에게 유익하다면 그것은 곧 우리에게도 유익하다. 라는 말이 나오지.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 변론이 없더군. 내가 안찾아봐서 그런가...ㅋ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생각해봤을 때 그 반쪽의 시학외에 나머지 시학은 절대 세상에 나오지 않을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더군. 왜? 그 반쪽의 시학은 비극이잖냐 나머지 시학은 희극 아니냐. 분명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의 문제점을 지적했을테니 말이지. 넌 어떻게 생각하냐? 말이 많았는데 사족을 제하면 공유는 무엇일까라는 것이니 그 네 선배 있잖아. 강화도 사는 함민복씨였든가 저번에 네가 신작 나온게 있다고 해서 읽어봤더니 맘에 와닿는 詩가 있더군. 국밥집에서 밥먹는데 시집이 너무 싸다라는 생각을 했더랬데. 밥값보다 사니 그런데 세상 사람들 마음을 배불린다는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든가 뭐 그런 내용이었는데 그런데 그거이 너무 교과서적인거 아닌가...ㅋㅋㅋ 詩는 참 맘에 와닿더군. 좋은 선배 같더라...시는 말캉말캉하게 써야되는거 같다...ㅋㅋ 문학에서의 공유는 시집값을 받고 공유해야하는건가? ㅋㅋㅋ 네 말대로 말만 많이 늘었군. ㅋㅋㅋ =================================================== 네 말대로 사실상 공유는 불현듯 어느 곳에서 나타난 건 아니다. 공유는 태초 그러니까 아담과 이브가 존재하기 전 그리고 신이 존재하기 전부터 생존해 있었으며 진화해왔다고 봐야겠지. 컴퓨터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공유가 인식되고 알려지게된 건 시대적 인식때문이었다고나 해야하겠지. 사실 컴퓨터 분야의 선구자적인 프로그래머들(물론 초창기 해커들도 포함한)의 철학적 인식이 한몫을 했겠지만. 우리가 햇살을 손에 쥘려고 하지 않듯이 어느 생명체도 햇살을 손에 쥐지는 않지. 다만 공유할 뿐. 어쩌면 내가 네게 공유를 물어본 건 나의 조급함때문인지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불신에서 오는 조급함들이라고나 할까. 사회 아니 지구상의 진정한 발전은 모두가 공유되는 행복 혹은 햇살을 만끽하는 것이어야할텐데 그게 만고 나만의 생각인냥 느껴지는 불신에서의 조급함이라고 해야겠지. 루카치의 미학을 읽어가면서 보니 탈인간주의에 대한 얘기가 있더군. 나도 상당부분 공감되어지는 부분이더군. 루카치 이전의 맑스가 얘기한 적대적 모순의 완벽한 해결점과 같이 말이지.(물론 루카치가 맑스의 영향을 받은 건 인지하는 거고) 인간철학의 발전과정들이 있다고 보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여기서 인간철학이라고 함은 포괄적 개념의 전체 인류가 아니라 한 인간의 철학 성장 과정을 말하는거다. 인간 개개인의 철학 성장 과정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군.(물론 황혼의 세발 걸음은 다수의 인간을 얘기한 것일테고) 한단계 한단계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단계의 틀을 깨어야하고 그 완벽한 해체 위에 새로운 단계를 올리는 과정들.(정말이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 닮아있지 않냐?) 하지만 작금의 이곳은 철학의 성장이 멈추어버린 제로섬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더군. 개인의 철학 부재와 집단의 철학 부재. 철학은 없고 이기와 오로지 자신만의(혹은 집단만의) 편함을 위한 욕망의 정액들이 널려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군. 특히나 개인의 철학이 집단의 부재된 철학에 짓눌리고 폭행당하는 이러한 모순들은 종국에는 다양성을 잃고 육종된 종자들만 남게되는 획일성 즉 나치즘만 남는 황폐성을 이루게 되겠지. 그렇다면 왜 이런 모순들이 존재하고 발전하고 있을까? 여기에 불신이라는 놈이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이 나라의 역사가 진실이 없고 이 나라의 국가형태가 진실이 없는. 엊그제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의 재방송을 봤었지. 오월, 광주에 관한 책들을 소개하며 얘기하더군. 그때 '오월의 신부'에서 누군가가 오월 그날의 새벽에 광주거리에 울려퍼진 그녀의 말을 읽어보더군. 문득 예전에 들었던 그녀의 녹취록이 생각나더군.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려지자 눈물이 흐르더군. 처음에는 광주 시민 여러분 다함께 나와 싸웁시다 라고 마지막에는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초탈에 가까운 아니 어쩌면 마지막 희망에 말일 수도 있는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라는 말이 내 마음을 슬프게 하더군. 우린 과연 그들을 잊지 않았을까? 우린 그들을 잊고 잔치상에만 눈길 주지 않았을까? 아직도 오월의 광주는 불신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그날 새벽 광주 시민들은 도청에 남은 그들을 애써 못들은 척 하며 죽여버렸지. 그리고 이 나라의 지식인이라는 인텔리들은 여지없이 그 나약함의 본성을 드러냈지. 그리고 세훨이 흘러가버렸어. 오월의 광주를 '절대공동체'라는 말로도 표현하더군. 물론 도청 공격이 있기 전까지겠지만. 어쩌면 그건 절대공동체가 아니라 맑스의 최종 유토피아와 일맥상통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물론 고도 자본주의 단계가 빠졌으니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그런데 그 절대공동체도 총칼과 폭력앞에 무너져 버렸다? 무엇이 그들을 공동체 붕괴로 이어지게 했을까? 무엇이 도청에 그들을 모른 체 하게 했을까? 흠 말이 확실히 많아진거 같군. 요즘 나도 너처럼 말과 정신의 엇박자가 이루어지고 있지. 사실 두뇌의 모든 표현들을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해내기는 힘들다고 하더군. 내가 생각해볼 때 자아는 하나가 아닌거 같더군. 여러 가지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더군. 자아도 역시 생성되고 소멸되며 진화해나가지. 물론 의도적인 자아도 존재하겠지만. 이 자아들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는 걸 느낀다. 한쪽의 자아는 진정한 의미의 공유를 펼쳐보이지만 또다른 한쪽의 자아는 이기로 충만한 제한된 공유를 펼쳐보이지. 이 싸움은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이거이 이누야샤처럼 반요인건가? 쩝...그럼 사혼의 조각을 모아야하나...ㅋㅋㅋ 참고로 음악에서 두가지 화음을 한자리에 넣지 않는다고 하더군. 예전의 음악가들은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군. 인간의 두뇌가 두가지 화음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글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이의적인 표현은 인간 두뇌에 부하가 걸리는 듯 하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신경림 시인이 '메타포'를 얘기한 듯 해. 빌어먹을 메타포 ㅋㅋㅋ 아 참 그리고 하나 더 두뇌에서 기억이라든지 여러가지 처리들을 영상으로 하는 걸 아는 지 모르겠네. 물론 학설이지만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영상물이 인간에게 더 쉽게 전달되어지지 않겠냐 글이 생존할 수 있을까? 사멸되어가는 걸 억지로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까짓거 사멸되어가는 거라면 한번은 불붙고 사라지겠지. 그때를 노려봐? ㅡ.,ㅡ ㅋㅋㅋ |
2005/07/26 0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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