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런두런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최민식, 조은[샘터]

황새울 2006. 12. 27. 14:53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낮은 데를 향해서 치열하게 움직인 카메라"

 

1955년 우연히 접하게 된 스타이켄의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은 내 인새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책의 갈피에는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감동적인 사진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

입니다. 나는 마치 오래 전부터 기다리던 소식을 접한 것처럼 그 사진 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

다. 그러면서 그것이 앞으로 내게 닥쳐올 일의 희미한 서막임을 감지했습니다. 내 사진 작업

은 그때의 감동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진의 중심 테마가 대부분 인간에 관한 것이듯 나 자신 또한 일관되게 '인간'을 다루

어 왔습니다. 나와 50년을 함께 해온 카메라는 항상 낮은 데를 향해서 치열하게 움직였습니

다. 그 카메라 앞에는 소외된 이웃들이 서 있었지요. 사진은 인간의 삶을 밝히는 작업입니다.

나는 늘 지금 내가 찍고 있는 사진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내 목소리가 세

상 사람들 마음에 도달하리라 확신했습니다.

사진의 생명력은 논리 이전의 감동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때문에 나의 사

진은 항상 휴머니즘에 입각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전하는 진실한 이야기'를 민중들에게

전하는 책임과 사명, 이것이 내 사진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과 불평등 그리고 소외의 현장을 담은 내 사진은 '배부른 자의 장식적 소유물' 이 되는 것

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가난하고 누추한 삶의 진실을 사랑하는 나는 호화주택에서 사치스

럽게 생활하는 졸부들에 비해 가난한 서민의 진실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가를 잘 알고 있

습니다.

사실 나 역시 사진가의 길을 가면서 의식주를 해결하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사진 작업을 가

능하게 하는 안정적인 직업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많은 좌절과 절망을 겪기도 했지요. 더

욱이 사회고발적인 측면을 강조한 사진 때문에 유신과 군사독재 시절에는 국가권력으로부터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진은 나를 찾아주었습니다. 나는 사진만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사진에 나를 송두리째 맡겼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나가는 말로 '사진은 왜

찍어, 돈도 안 되는데'라고 말했지만 지금까지 돈을 위한 사진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

인생에 오직 하나 행운이 있었다면, 내가 팔리지 않는 사진에 미칠 수 있었던 점입니다. 이는

모두 가난한 서민들이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살아 움직이는 그들의

지난한 삶에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고 슬퍼할 수 있었던 것,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을 감

사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앞으로도 오직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내 사진작업의 생애를 걸 생각입니다. 우리 시대

의 진실을 살펴온 나의 사진에 담긴, 그러나 지금은 아니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수많은 분들에

게 이 자리를 빌어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감히 말하자면 나의 사진 작업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 끝까지 가난하고 소외

받은 이들과 함께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나는 새로운 체험을 할 때마다 그 체험 속에 들어 있는 어떤 핵심적인 의미 같은 것을 발견하

려고 노력해왔습니다. 나는 사진의 가치를 내가 사는 동안 겪은 체험에 두고 있으며 실제로 그

체험에 의존해왔습니다. 이번에 엮어내는 책을 통해 나는 새로운 감동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

다. 시인 조은 씨가 내 사진에 새로운 생명력의 입김을 불어넣어준 것이 그것입니다. 조은 씨

는 내가 미처 사진 속에서 발견해내지 못했던 것들, 소소하지만 살아 있는 의미들을 하나하나

호명해서 불러내주었습니다. 시인이 이 삶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가지는 순구한 애정을 통해

조은 씨는 내 사진에 새로운 빛깔과 향기와 이름을 선사해주었습니다. 한번도 만나지 못한 시

인과 내가 사진과 글을 통해서 이처럼 애틋한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퍽 감동스럽습

니다. 조은 씨가 내 사진에 입힌 글들은 이 책을 보는 독자들로하여금 내 사진 속의 인물에게,

그 공간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가게 해줄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모두가 축복된 일입니다.

 

2004년 가을 최민식

 

 

"악성 바이러스를 꿋꿋이 이겨내게 하는 항체로서의 사진"

 

 

리얼리즘 사진의 정수인 최민식 선생의 사진세계에 푹 빠져 지내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몇

가지 생각들이 좌충우돌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우리들 모두는 저마다 삶의 출발점이

달랐다는 생각입니다. 같이 백 미터 달리기를 해도 어떤 사람은 정확히 백 미터 지점에서 출발

신호를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겨우 몇 십 미터만 남겨놓은 지점에서 신호를 받고, 또 어떤

사람은 백 미터가 훨씬 넘는 지점에서 신호를 받기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실상이라는 식의

심리적인 벽을 느끼고 있을 때 이 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작업을 통

해 누군가가 우리 사회나 조상들로부터 무엇인가(명예, 경제력, 우수한 유전자, 출중한 외모

등등)를 더 받았다면, 그것은 겸손해야 할 요소이지 오만의 구실은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

다. 그 대상을 나에게로 옮겨 생각하자 늘 삶을 부정적으로 보던 나도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

하는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주눅들 이유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뒤집어 생각해 보니, 늘 열

등감에 사로잡혀 사는 나 자신에게도 겸손해야 할 이유가 많았습니다. 이 책을 대하게 될 독자

들도 나처럼 삶으로부터 자신들이 당당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나는 최민식 선생의 작품을 통해 내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 느끼는 불안이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최근의 경제적 위기와 그로 인해 예견되는 더 나쁜 상황을 무서워하기

에 앞서 그 상황을 꿋꿋이 견뎌낼 자신이 없는 심약한 자기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리들이 가난에 낭만이나 환상을 가지지 않을 만큼 현실적이 되었고, 고통을 화두로 삼

지 않을 만큼 영악해진 탓인 듯합니다.

최민식 선생의 사진은 인간의 불행이라는 악성 바이러스를 꿋꿋이 이겨내게 하는 항체 역할

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사진이 가진 힘이자 덕목 중 하나이지요. 그가 치열하게

사유하며 선택한 세계는 많은 부분이 어둡고 암울합니다. 그러나 그 세계와 맞선 그의 시선은

더없이 따뜻합니다.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되, 그는 전투적

인 사람이 아니라 온화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의 불행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삼아온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세세한 결을 느끼며 오랜 세월 혼

신의 힘으로 창작에 전념해온 사람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작품세계에 빠져들다 보면 자

신도 모르게 불행을 바라보던 기존의 시선이 수정되며 어떤 고통과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배

짱이 생깁니다.

나는 얼마 전 이념이 강한 한 잡지에서 무척 인상적인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펌프질을 하

는 두 아이의 모습이 음영으로 처리된 멋있는 사진이었지요. 당연히 누구의 작품인지 궁금했

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꼼꼼히 읽으며 사진을 찍은 사람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헛일이었습니

다. 결국 궁금증을 남긴 채 외국 작가의 작품이려니 했는데, 나중에 최민식 선생의 작품집에서

그 사진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후 저희 집에 들른 샘터사의 김도언 씨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가 최민식 선생은 누가 자신의 사진을 좀 쓰자고 하면 조건 없이 선뜻 승낙한다

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자 남의 창작물을 대가 없이 쓰면서 작가도 밝히지 않은 잡

지사의 문화적 소양이 답답했던 한편, 자신에겐 삶의 의미나 다름없을 결과물을 조건 없이 나

누고 있는 선생의 한결같은 신념과 따뜻한 마음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나는 최민식 선생을 만나보지도, 목소리를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평생 확신을 갖고 한길을 걸어온 그를 작업에 앞서 만나면, 그의 정신력에 눌려

내 몫의 일이 힘들어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인사하는 자리를 만들겠다는 출

판사의 제의를 나로서는 미룰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그런데 이제는 그를 빨리 만나보고 싶습

니다. 만나서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왕성한 창작 에너지를 어떻게든 나의 삶과 문학 속으로

욕심껏 흡수하고 싶습니다. 그 야무진 생각으로 나는 요즘 더없이 설레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

니다.

 

2004년 가을 조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최민식, 조은[샘터]

 

 

 

알기만 알았던 최민식씨의 사진집을 한권 빌려보았다. 한번쯤을 봤을 듯한 사진,

한번쯤은 살아오면서 느꼈을 모습, 한번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게될 지 모른 날들

그 수많은 날들을 한권의 책으로 볼 수 있다는 게 고맙니다.

책의 앞머리에 그의 말과 글을 쓴 시인의 말이 따스하게 와닿아 기록해본다.

글과 사진, 사진과 글

하나이기도 하지만 하나가 아닌...

사진에 글을 덧대면 어떨까 혹은 글에 사진을 덧대면 어떨까를 간혹 고민했었다.

사진도 하나의 작품이고 글도 하나의 작품인데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작품을 보조한다는 생각에 영 내키지 않았었다.

또한 두개의 작품이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의 일체감을 줄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오래된 얘기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詩는 그림에서 회(회가 맞는지 모르겠네)를 빼았아 와야한다는...

글이든 사진이든 완벽하다면 그 홀로 존재해도 충분할테고

완벽하지 않아도 글과 사진이 하나의 완벽에 기인한다면 둘이 존재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다.

꼭 홀로 완벽할 필수요건은 아닌 듯 하다.

그는 주로 망원렌즈를 쓴다고 하였다.(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사실 앙리처럼 49mm 표준 렌즈로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렌즈를 인식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정확한 모습을 찍기가 힘든 것이다.

망원렌즈를 쓴다면 인식하지 못하는 거리에서 충분히 그 사람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하겠지만...

 

세상엔 많은 따뜻함들이 있지만

그 따뜻함들이 의사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거 같다.

아니 부족하기보다 부재한 거 같다.

많은 따뜻함들이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면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질텐데 말이다.

 

글 한페이지 사진 한페이지 형식을 띤 이 사진집에서

뭔가가 충분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가 빠진 것 같기도 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두 사람이 전혀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교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세세한 면에서는 어색함이 존재하겠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넘치지 않을 만큼의 충분함이 존재하는 듯 하다.

 

 

 

 

06.12.27 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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