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사랑, 그 끝없는 중독" 1

황새울 2006. 7. 4. 14:37


"사랑, 그 끝없는 중독" 1


"널 사랑한게 아니었던거 같아.
아마도 너의 글을 사랑한 거 같아.
이제 우리 헤어져. 미안"

언제나 떠나는 사람들이 붐비는 터미널에서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만약 이 터미널이라는 곳이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을 가졌다면
그는 오래지않아 고목처럼 말라버렸을지도 모를 거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찾아오지만 정작 그들은 아무런 느낌없이 떠나버린다.
터미널이 어린애였을 시절에는 그들을 무척이나 반갑게 맞이하였겠지.
하지만 곧 떠나버리고 남은 것은 그들의 체취와 담배꽁초, 종이컵.
그것도 이내 다른 이들의 체취와 담배꽁초, 종이컵으로 바껴간다.
무수한 시간 속에 방치된 그는 점점 메말라가고
이제는 어떠한 흥분도 어떠한 즐거움도 어떠한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굳어져가는 것이다. 안으로부터.
사람들이 그에게 매력을 느끼는 건 종착지에 대한 시간 정보들
그리고 도착지의 안도감일 뿐 그를 사랑한 건 아니다.

"널 사랑한 게 아니었던거 같아.
아마도 너의 시간정보를 사랑한 거 같아.
그러니 나에게 치근덕거리지마. 넌 왜 그렇게 무디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총총총 버스를 향해 달려간다.
나도 그들 속에 묻히어 버스로 실려간다.
버스에 타고 있으면 이게 꼭 남자의 성기같다는 생각이 매번 든다.
버스 속의 사람들은 성기 속의 정자들.
그들은 수시로 난자를 향해 성기 밖으로 배출되어 나간다.
한번 배출된 정자가 다시는 성기로 돌아오지 않듯이
그들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늘상 정자들을 채워 돌아다니는 이놈은
늘상 정자들이 원하는 자궁역에 데려다준다.
그들은 꼬불랑거리는 꼬리를 흔들며 열심히 난자를 향해 꼼지락거리며 나아간다.
그들의 난자는 포근할까?
그들의 난자는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데워줄까?
그들의 난자는 그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체들을 내놓을까?
난자를 잃어버린 나는 그런 물음들을 수없이 되뇌인다.
그런 시간 속에서 점점 나는 애물단지가 되어간다.
성기 속에 남은 정자들이 차례차례 방출되어가고 새로운 정자들이 차지만
오랫동안 꿈쩍도 하지 않는 나는 죽은 정자인지를 심문받는다.

"표 보여주세요. 살아있는 정자표를 내보이세요."

"... ..."

"갖고 계세요. 도착지에 갈 때까지요. 안그럼 실려나갈지도 몰라요.
그리고 도착할 자궁역까지는 상당히 오래 걸리니 죽지않도록 잘 움직이세요."

그렇게 성기는 정자들을 관리하며 다시 새로운 자궁역을 향해 달린다.
무수히 지나치는 저 풍경들은 한편의 필름마냥 차창에 차르르르 감겨간다.
한편의 수채화 같은, 한편의 정물화 같은, 한편의 지나간 기억들처럼.




 

2006/03/08 21: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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